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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명

설산에 새겨진 이야기, 고대 티베트는 신화로 문자를 만들었다.

by 정직한날 2025. 12. 14.

티베트 문명의 남아있는 흔적

고대 티베트 문명은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과 광활한 고원지대 속에서 자생한 독특한 문화권으로, 그 깊이와 고유성이 오랫동안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티베트는 오래전부터 신화와 설화를 통해 세계를 설명해 왔으며, 이들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탄생, 땅의 형성, 종교와 정치의 기원이 한데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서사적 전통 속에서 티베트의 문자가 태동했습니다.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이었고, 문자 체계는 세계를 정돈하는 질서이자 기억의 도구였습니다. 문자와 신화가 함께 시작된 고대 티베트의 문화는 문명의 정의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과 짐승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 티베트 설화의 근원

티베트 설화는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신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티베트인들의 창세 신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원숭이와 암마귀의 설화'입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티베트 고원의 외딴 지역에 수행을 하던 자비로운 원숭이 수행자가 있었고, 마왕의 딸인 암마귀가 그를 유혹합니다. 원숭이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결국 그녀와 결합해 여섯 자식을 낳습니다. 이 자식들이 점차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농사를 짓고 옷을 만들며 문명을 일으켰다고 전해집니다.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이 바로 원숭이와 마귀의 혼혈 후손이라고 여겼으며, 이는 인간의 이중적 본성—자비와 욕망, 지혜와 본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서사 구조입니다.

이 창세 신화는 단순한 민담이 아니라, 티베트 사회가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 사유 구조입니다. 자연 속에서 태어난 인간, 동물과 신의 경계에 선 존재라는 개념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티베트의 사상과 문화에 깊게 뿌리내려 있었습니다. 이처럼 티베트의 설화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설명하면서, 신화적 사고방식으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야기를 새기다, 문자 체계의 탄생

티베트는 오랫동안 구전의 문화였습니다. 이야기꾼과 노래, 상징과 기억을 통해 세계를 전했지만, 기원후 7세기, 송첸 감포(Songtsen Gampo) 왕의 통치 아래, 처음으로 체계적인 문자 도입과 기록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송첸 감포는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중국 문자를 접했지만, 이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를 참고해 티베트 고유의 문자 체계를 만들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톤미 삼보다(Tonmi Sambhota)'로, 그는 인도 유학 후 티베트어의 음성과 문법에 맞는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고안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탄생한 티베트 문자는 단순한 기호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신화와 설화, 구전 시가를 기록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혁명이었습니다. 문자 체계가 갖춰지자, 불교 경전의 번역과 왕명, 역사서의 기록이 가능해졌고, 이는 곧 티베트 문화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불교 사상뿐 아니라 토착 신앙인 ‘본교(Bön)’의 경전과 제례의식도 문자로 정리되면서, 티베트는 ‘구전의 시대’에서 ‘기록의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문자 창제 자체가 설화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입니다. 티베트인들은 문자가 하늘의 영감, 신의 선물이라 믿었으며, 문자 하나하나에 우주와 인간, 신의 이치를 담고자 했습니다. 문자란 단순히 말을 적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고정하는 도장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티베트 문자에는 음성학적 정확성뿐 아니라 철학적 상징성도 깃들어 있습니다.

이야기와 문자의 공존, 풍부해진 문명

고대 티베트의 문화는 이야기와 문자가 공존하는 세계였습니다. 문자가 도입되었다고 해서 구전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더욱 풍부해졌고, 기록을 통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 전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티베트 불교 문학의 주요 형식인 ‘마니카본(Manikabum)’이나 ‘비서전(Biographies of Saints)’들은 대부분 구전 서사를 문어체로 옮긴 결과물로, 단어 하나에도 상징이 살아 숨 쉬고, 문장 구조에는 이야기의 리듬이 녹아 있습니다.

티베트 문자로 기록된 문헌들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행의 도구이자, 공동체 기억의 매개였습니다. 경전은 읽는 것이 아니라 외우고 부르는 것이었으며, 필사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의례였습니다. 사원의 벽화, 탑에 새겨진 경문, 천에 적힌 경전 등, 티베트 사회는 문자와 예술, 종교를 일체화시키며 문자의 생명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처럼 설화와 문자는 티베트 문명의 양대 축이었습니다. 설화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만들었고, 문자는 그 세계를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게 했습니다. 돌 위에 새긴 것이 아니어도, 그들의 이야기는 문자의 생김새와 그 안에 담긴 철학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티베트는 ‘말로 쓰여진 나라’이자, ‘이야기로 만들어진 문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