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대 문명

누라게로 본 고대 사르디니아 석조건축의 미스터리

by 정직한날 2025. 12. 16.

사르디니아 섬에 남아 있는 누라게 석탑 유적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한 사르디니아 섬은 고대 지중해 문명의 교차로였으며, 그 중심에는 수수께끼 같은 석조 구조물, ‘누라게(Nuraghe)’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돌을 층층이 쌓아올린 이 건축물은 약 기원전 1800년경부터 사르디니아 전역에 걸쳐 세워졌으며, 현재까지 7천 기가 넘는 누라게가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능, 건설 방식, 사회적 의미 등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누라게 문화가 어떤 환경과 배경 속에서 발전했는지, 어떤 건축적 특징과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지를 중심으로 고대 사르디니아의 독자적 문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르디니아의 풍토와 누라게 문화의 탄생

사르디니아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와 마주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선사 시대부터 다양한 인류 문화가 교차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고대 사르디니아인들은 이방의 문명에 단순히 영향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건축 문화를 만들어낸 주체였습니다. 누라게는 그 대표적 상징으로, 기원전 18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경까지 오랜 기간 동안 사르디니아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누라게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청동기 후기이며, 이는 유럽 대륙의 청동기 문화와 동시대입니다. 그러나 사르디니아의 누라게는 그 어떤 외부 건축 양식과도 명확히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원형 평면과 원뿔형 탑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창성은 고립된 섬이라는 환경과 자생적 사회 조직, 그리고 토착 신앙 체계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라게는 단순한 거주 시설이 아니라, 종교, 정치, 방어 등 복합적 기능을 지닌 중심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돌 위에 세운 탑 – 누라게의 건축적 특징

누라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대한 돌을 모르타르 없이 쌓아 만든 원뿔형 탑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수직으로 높아지며 중심에는 회전하는 나선형의 계단이 내부에 숨겨져 있고, 위쪽에는 감시용 개방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중심 탑은 보통 2층 이상이며, 내부에는 반구형 천장을 가진 원형 방이 있으며, 입구는 돌린 문틀과 차폐 구조를 사용해 방어적 기능을 갖췄습니다.

주된 건축 재료는 현무암과 석회암으로, 현지에서 채석하여 절단 없이 자연 형태 그대로 적층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구조물들은 오늘날까지도 무너짐 없이 남아 있을 정도로 견고하며, 어떤 구조물은 높이 15미터를 넘기도 합니다. 누라게 주변에는 위성 건물과 담장, 정사각형 방, 우물, 예배소, 곡물 저장고 등 부속 시설이 함께 구성되어 있어, 누라게 하나가 마을 단위의 생활 중심체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특히 바리우(Nuraghe Barumini) 유적과 같은 복합 누라게는 하나의 중심 탑을 중심으로 4개의 작은 탑이 사각형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로, 마치 성곽과 같은 형태를 보입니다. 이는 단순 방어 기지를 넘어서, 종교적 권위 혹은 통치 권력을 상징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서는 제단 흔적과 토기, 무기, 장신구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누라게가 사르디니아 사회에서 군사·정치·종교 기능을 포괄했음을 암시합니다.

누라게를 통해 본 사르디니아의 사회와 신앙

누라게의 분포는 사르디니아 전역에 걸쳐 있으며, 일정한 거리마다 누라게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각 누라게는 하나의 지역 권력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누라게는 단일 국가 체계보다는 지역 집단 중심의 분권적 권력 구조 하에서 기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각 누라게 주변에 소규모 정착지, 공동 우물, 묘지 등이 함께 발견되며, 이는 하나의 누라게가 특정 공동체의 종교·정치·경제 중심 역할을 했음을 나타냅니다.

누라게 사회는 종교와 신앙 체계에서도 독특한 면모를 보입니다. 여러 유적지에서는 우물과 연결된 제단, 인신 공양 흔적, 태양 또는 물의 신과 관련된 상징 구조물이 발견되며, 이들이 물과 관련된 신비주의적 신앙을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여성 형상을 한 석상이나 풍요를 상징하는 조각물은 생식과 번영을 기원하는 다산신 숭배의 흔적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르디니아 지역에서는 누라게를 단순 유적으로만 보지 않고, 문화적 정체성과 연결된 뿌리로 인식합니다. 누라게는 외부 침략에도 굳건했던 자생적 석조건축 기술의 상징이며, 이 고대 석탑들을 통해 우리는 문자 없이 전해진 사르디니아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라게는 아직도 많은 비밀을 품고 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사르디니아가 결코 변방의 문화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