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이전의 고대 필리핀은 단순한 부족 중심 사회가 아닌, 정교한 지배 체계와 사회적 위계를 갖춘 복합 공동체였다. 특히 마닐라를 중심으로 발전한 타가로그 지역에서는 ‘라칸(Lakan)’이라 불리는 최고 지배자가 군사, 종교, 정치 권력을 통합해 통치했으며, 그 아래 ‘마하라리카’, ‘마그아노사’, ‘알리핀’ 등의 계층이 위계적으로 구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라칸 체제의 성격, 귀족 계급의 구성과 역할, 그리고 당시 사회 구조가 고대 필리핀 문명에 끼친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라칸, 고대 필리핀 정치 권력의 상징
‘라칸’은 고대 타가로그 사회에서 정치적·군사적 권위의 정점에 위치한 지배자였으며, 마을 또는 지역 단위의 독립적 공동체인 바랑가이(Barangay)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였다. 이들은 단순한 족장이 아니라, 세습적 귀족 계층 출신으로 종교 의식의 주재자이자 전시에는 군대의 최고 지휘관 역할을 수행했다. 라칸의 권위는 신성함과 용맹함, 혈통의 정통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준신적 존재로 여겨졌다.
마닐라만 일대에는 여러 바랑가이가 존재했으며,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룬 바랑가이가 주변 부족을 병합하며 ‘연맹체’를 구성했다. 이 연맹체의 수장이 바로 라칸 다툴라크(Lakan Dula)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무역과 외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중국, 말라카, 브루나이와의 해상 교류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였다. 이를 통해 라칸은 단순한 부족장이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를 포괄하는 복합 권력의 구심점이었다.
라칸의 권력은 대부분 혈통에 의해 세습되었으나, 때로는 연맹 내 정치적 정세에 따라 라칸의 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는 단일 왕국이 아닌, 느슨한 부족 연합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라칸이 수행하는 제의적 역할과 종교적 권위는 쉽게 대체될 수 없는 핵심 요소였다. 그들은 전통 의례에서 야니토(Anito)라 불리는 조상신과 영혼을 중재하며, 자연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도 겸했다.
마하라리카와 마그아노사: 계급에 따라 나뉜 고대 필리핀 사회
라칸 아래에는 여러 계급이 존재했는데, 가장 상위 계급은 ‘마하라리카(Mahararlika)’로, 자유민이자 전사 계층이었다. 이들은 라칸의 측근이자 바랑가이 내에서 독립적인 권리를 가진 자로, 토지를 소유하거나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마하라리카는 전쟁 시 군사 지휘를 맡고, 평시에는 외교 사절이나 종교 제의 보조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다음 계급은 ‘마그아노사(Maginoo)’였으며, 이들은 마하라리카와 유사하지만 보다 실질적 행정 역할을 담당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마그아노사가 귀족의 핵심 계층으로 간주되며, 혼인, 재산 상속, 법적 판결에도 참여했다. 이들의 가문은 엄격한 혈통과 계보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권력은 가부장 중심으로 세습되었다.
한편, 사회의 기반을 이루던 계층은 ‘알리핀(Alipin)’이었다. 알리핀은 노예나 종속 신분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의 의무 노동자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일부는 전쟁 포로였으며, 일부는 빚을 갚기 위한 계약노동 형태였다. 중요한 점은 알리핀도 사회적 이동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일정 기간 복무 후 자유민이 될 수 있었고, 상위 계층의 호의를 얻어 마하라리카 계층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계급 구조는 단순한 신분 차이를 넘어서, 고대 필리핀 사회의 정치·경제적 기능을 분담하고 상호 작용하는 유기적 시스템이었다. 각 계급은 종교, 행정, 무역, 농업 등의 역할을 맡아 전체 공동체를 유지했으며, 이 구조는 스페인 도래 전까지 상당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라칸 체제의 해체와 식민지 시기의 영향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필리핀 제도에 도달하면서 기존의 바랑가이 체제와 라칸 중심의 지배 구조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라칸 다툴라크가 스페인과의 조약을 맺고, 결과적으로 마닐라 지역이 식민지화되는 과정이다. 기존의 자치 체제는 급속히 해체되었고, 귀족 계급은 스페인 식민 행정에 흡수되거나 저항 속에 몰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라칸 가문은 카톨릭 개종과 스페인식 이름 수용 등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 특히 ‘이달라오(Ilustrado)’라 불리는 계몽 귀족층은 훗날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라칸 체제는 해체되었지만,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정체성과 계급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필리핀에서는 라칸과 마하라리카, 알리핀 같은 전통 계급 용어가 다시 조명받고 있으며, 역사적 자긍심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고대 지배 구조가 아닌, 독립성과 문화적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 모델로 재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고대 필리핀의 계급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문화, 언어, 관습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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